* 본 작품은 기 웹사이트 게시 건입니다. (웹사이트 링크: 포스타입 글 주소: https://unikuite.postype.com/post/13281763)
도시는 장벽과 함께 물러나고 있었다.
한 겹 세워지고 다시 무너지면 그 뒤로 다시 한 겹. 바다와 대치하는 후퇴 방식은 역설적으로 그들의 적인 파도와 거울상처럼 닮아있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오직 밀물과도 같은 적들의 전진에 대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반대 방향 뿐이었다는 것이다.
후퇴하면서 미처 수습하지 못한 동료의 시체와 마지막까지 생명과 바꿔서 한조각이라도 그러모으려던 물자들은 밀려오는 육지의 바다에 가라앉았다. 더 이상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개인적인 감정 같은 것은 수없이 전해져야 하는 비통한 소식들에 진작에 마비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함께 있는 자리에서 재생된 마지막 ‘선봉대’의 작별 인사에서 평온하고 짤막한 리베리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쏜즈는 아직도 자신에게 더 마모될 것이 남아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더 들을 필요 없다 생각해 자리를 떠나 섰던 바닷가에서 생존자인 재판관을 다시 만났을 때, 이미 마음은 고요했다. 파도 소리가 이물처럼 견딜 수 없이 귓가를 파고들어 그녀의 사라질 듯한 목소리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손에 남겨진 개인용 통신단말에는 이전에 종종 보던 라벨의 기록 칩이 들어있었다.
“ … …그는 마지막까지 훌륭한 대원이었어요. ”
“ … …고맙다. ”
그녀는 담담한 쏜즈의 태도에 잠시 에기르의 얼굴을 응시했지만 이내 뒤돌아섰다.
어차피 서로 짊어져야 하는 하루치의 비탄이 너무나 무거워 그 이상 서로 얹을 수 있는 말도 없었다.
통신단말의 수리에는 꼬박 반나절이 걸렸다. 더 이상 이곳에 이런 종류의 음성칩을 재생 할 수 있을 정도의 멀쩡한 기기는 남아있지 않았거니와, 이것은 엘리시움 본인이 쏜즈에게 마지막으로 보내온 내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부족한 시간과 물자를 이용해 최선의 결과를 만드는 게임. 엘리시움은 세계가 서서히 활기를 잃어갈 수록 이런 희생이 전략의 하나인 게임은 점점 좋아하지 않게 되어 쏜즈의 승률은 이번 결과를 포함해 70%를 웃도는 것으로 둘 사이의 스코어 북은 영원히 닫히게 되었다.
오늘 아침도 최후의 방어선은 몸서리치며 한 발 더 내륙 쪽으로 물러났으나, 그 뒷걸음질하는 파도는 에기르를 휩쓸어가지는 못했다. 늘 들고 다니던 가방에는 형광의 액체가 담긴 피스톨 주사기와 통신기. 그리고 필요 최저한의 약제와 비상용품이 들어있었다. 사람들의 지친 후퇴와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자, 생기 없는 아는 얼굴과 모르는 얼굴의 하나하나가 쏜즈에게 물어왔다. 너는 춤을 추러 가느냐고. 춤을 추러 가느냐고.
고물이 다 된 통신기가 혹시라도 넘어지지 않도록 넓은 바위 위에 정중히 세팅하고 그 옆에 걸터앉는다. 문명은 이제 쏜즈의 뒤로 문을 걸어 잠그고 최후의 항전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하긴 그는 언제나 자발적 추방자였고 결국에는 또 비슷한 방식으로 몇번째일지 모르는 고향 아닌 고향을 잃은 셈이었다.
재생버튼을 누르자 어느 새 옆까지 밀려온 바다가 그와 함께 귀를 기울였다.
「 흠흠. 쏜즈. 거기 있어? 」
얼마만에 듣는 목소리였을까.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친숙해 오히려 현실감이 없는 목소리에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게 된다.
「 하… …. 사람 일이 참 생각보다 잘 풀릴 때는 꼭 다른 데서 엉망이 되고 있더라. 브라더. 지금 전황이 많이 안 좋아. 얼마나 안 좋냐면 정말 안 좋아. 이 녹음도 혹시 남기는걸 들켰다가는 분위기가 안 좋아질까 봐 멀리 나와서 하고 있는데 으스스하네! 」
리베리의 목소리는 속삭이고 있기는 해도 여느 때처럼 경쾌하고 밝았지만 묘사하는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외모에 대한 자화자찬을 제외하면 항상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겸손하게 말하는 경향이 있는 그는, 지금도 쏜즈에게 ‘개인적인 유언’을 전한다는 목적 하나를 위해 필요 없는 사선을 건너고 있는 것이다. 본말전도적인 터무니없는 무모함에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지만 안타깝게도 이 통신은 쌍방향이 아니기에 쏜즈에게는 이 녹음의 마지막에 들리는 것이 비명횡사가 아니기를 비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 어쨌든 쏜즈, 사실 이걸 들을 일은 영원히 없었으면 좋겠지만… …, 지금 이 얘기를 듣고 있다면 누군가가 너에게 이걸 전해줬다는 거니까… …, 그분의 노력을 허사로 돌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네가 이 고물의 재생기능을 고쳤길 바랄게. 아니 고쳤으니까 듣고 있는 건가? 우와, 평소보다 덜 현명한 엘리시움이지만 좀 봐줘. 」
「 브라더, 너는 내 몫까지 잘 살아줬으면 해. 」
“ … …. ”
「 사실 그렇잖아. 나는 광석병에 걸렸을 때부터 이 순간을 오랫동안 준비해왔어. 처음에는 물론 안 간 곳 없이 도망도 다녔던 것 같은데 요 몇 년간 너와 만나서… …, 이렇게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다면 언제라도 좋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원래는 내면을 단련해서 그야말로 백 년에 한 번쯤 나올까 말까 하게 멋지게 죽음을 맞이할 생각이었는데, 네 덕분에 언제든지 와라! 하는 상태였어서… …, 참, 내 장례식에 너한테 입고 오게 하려고 준비했던 옷이 있었는데… …, 후후, 마지막 아량으로 무효로 해줄게. 얼마나 착한 친구야~! 이제는 뭐. 장례식같은건 사치인 것 같으니 잊어줘. 새삼 고마워. 」
“ … ….”
「 이제 시끄러워서 끄고 싶어졌어? 우리 사이에 그런 건 아니지? 」
「 지금부터 진짜 할까 말까 고민했던 얘기할 테니까… …, 어디 가지 말고 끝까지 들어줘. 」
에기르는 잠시 재생을 멈췄다.
리베리가 애써 허세를 부리며 끼워 넣은 대로 시끄럽다고 생각해서는 아니다.
그가 할 말을 2년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방에서 꺼내둔 형광색 액체는 이제 그에게 편안함마저 주는 빛깔이었다.
엘리시움의 몫까지 살아 줄 수는 없으니 마지막 고백이라도 들어줘야 나중에 죽어서라도 끈질긴 인연에 재회했을 때 시끄러운 우는소리를 듣지 않을 것 같다. 자신은 천국에는 갈 수 없겠지만 어딘가에는 에기르와 리베리가 같이 갈 수 있는 사후세계 같은 것도 있을지 모른다고 평소라면 하지 않을 생각을 해본다.
그때까지 ‘에기르’로 남을 수 있을지는 이제 본인의 의지에 달렸다.
「 아마 너도 짐작하고 있었겠지만… …, 너를 좋아하는 것 같아. 아!!! 방금 거 취소취소! 같아는 빼고 좋아해!! 오래 전부터 귀하를 사모해 왔습니다… …, 하… …, 이거 이제 바다에 던져버려도 될까? 망한 것 같다… …, 역시 얼굴 보고 얘기했어야 했나 봐. 그랬으면 일단 브라더가 제일 좋아하는 내 얼굴 덕분에 조금은 나아 보였을 텐데. 일단 이걸 보낼지 말지는 더 고민해볼게. 아무튼, 너도 날 좋아한다 쪽에 걸어도 좋아. 뭐 당연한 내 승리일 것 같지만 반대인 경우라도 이젠 차일 수도 없는 셈이니까… …. 잘생긴 챔피언은 재도전을 받지 않고 먼저 가볼게!! 」
「 잘 있어. 쏜즈. 」
재생은 둔탁한 마른소리와 함께 종료되었다.
에기르는 자신이 몇 달 만에 웃음에 가까운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실을 칩을 통신기와 함께 바다로 던져 넣으면서 깨달았다.
챔피언이라니. 마지막 스코어대로라면 이긴 것은 쏜즈였다.
그리고 최후의 승자가 맞서야 할 마지막 내기는 아직 눈앞에 파도치고 있었다.
그래도 마지막에 추가된 엘리시움의 승리를 사사오입 해 리베리의 승률은 조금 높은 28%가 되었다.
그 숫자는 이 생기 없이 무너져내리는 침식된 세계에서 지나치게 다정한 리베리가 살아남을 확률처럼 느껴져 도중부터는 일부러 져주려고 했던 것을 기억한다. 너무나 쏜즈를 잘 아는 상대가 그럴 때마다 화를 내는 바람에 결국은 한 번도 그럴 수 없었지만.
처음 만났을 때 부터, 나는 그런 너를.
만약 이 마지막 내기에서 지게 된다면, 박사는 어차피 나의 약점을 알고 있을 것이다.
더 이상 미련을 가져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명료한 사고와 판단이야말로 최후에 그의 몸에 걸쳐질 무도복이었다.
몇마리의 바닷새들이 에기르의 마지막을 함께하는 것 처럼, 혹은 춤을 기다리는 것 처럼 소리 없이 맴돌았다.
- 마지막 춤에 관객이 있다는 것은 분에 넘치는 영광이다.
에기르는 한 번 눈을 감았다 뜬 후 주사기를 들어 몸 속에 고향을 밀어 넣었다.
순간,
시 야의 사각에서
황금 의
하… …, 메시지 고백에서 오십보백보인 음성녹음 고백이라니.
너무 멋이 없는 나머지 백 년에 한 번뿐인 미남에서 오십년에 한번은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동네 미남이 되어버릴 것 같다. 설령 여기서 살아 나간다고 해도 쏜즈를 마주하면 부끄러움으로 그 자리에서 죽을 자신이 있으니 노력해서 목숨은 최소 한 개 정도는 남겨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 아니, 역시 2년이나 기다리게 해놓고 겨우 이런 성의 없는 고백을 남긴 것에 분노한 브라더에게 맞아 죽을 가능성까지 생각하면 넉넉히 두 개는 필요할지도.
원래는 흰색이었던 넝마가 다 된 리베리는 쓴웃음과 함께 엉망인 논리로 생각하면서 젖은 바위에 등을 붙였다.
최후에 역할을 다 한 선봉대와 함께 미끼 역할을 자처하면서 유품 대신 넘긴 반쯤 고물이 된 통신단말은, 지금쯤 쏜즈에게 잘 전달되었을까?
이미 재생 기능을 잃기는 했지만 브라더라면 물자가 극단적으로 부족한 현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영리하게 수리해 녹음파일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폭발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그렇게 운명에 미움받을 정도로 나쁜 리베리로 살지는 않았으니 그건 이번에 천국에 가게 되면 신에게 직접 따질 일이다. 신도는 아니지만.
기도보다 악성 민원을 넣을 생각을 먼저 하고 있어서 오늘 이 모양 이 꼴이 된 게 아닐까? 듣고 코웃음 쳐줄 브라더가 없어서 왠지 맞는 말인 것 같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릴없이 생각을 하는 사이 주변은 어느새 끈적한 점막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틀 꼬박 몸을 숨길 수 있었던 바위 웅덩이도 드디어 무덤이 되어줄 모양이었다.
꽃잎같은, 백개의 손가락 같은 얼굴을 한 바다의 아이들이 조용히 엘리시움의 주변에 푸른 살점으로 된 파도처럼 밀려오고 물러나고를 반복했다. 밀려오고, 물러나고. 밀려오고, 물러나고, 물러나고… …, 다시 물러난다고?
정신이 번쩍 들어 자결을 위해 마지막까지 버리지 않았던 검을 다시 검집에 넣고 깃발 없는 깃대를 지지대 삼아 후들거리며 일어서자 그것들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 처럼 재잘거리며 썰물과 닮은 움직임으로 사라졌다.
돌아가야 한다.
죽음 같은 것을 두려워한 것은 너무 오래된 예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엘리시움에게는 한번은 포기한, 아직 듣지 못한 답이 있었다.
기대되지 않았던 엘리시움의 귀환은 생각보다 환대를 받았다.
떠나면서 했던 장렬한 각오에도 불구하고 방위선 주변은 그가 떠나기 전보다 상황이 나아 보였다.
장비도 보급도 없는 만신창이의 광석병 환자가 단신으로 복귀하는 기적이 일어날 만큼은.
분명 나설 때보다 전황은 호전되어 보이는데도 박사를 포함한 로도스 소속 오퍼레이터들의 얼굴은 어둡다.
하긴. 이런 상황에 통신원 하나가 살아 돌아왔다고 크게 나아지는 것은 없을 테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치료와 수분 보충을 하면서 인원이 많다고는 할 수 없는 방어선 안쪽을 살폈으나 천막을 재건하는 쪽에도, 무기 손질을 하고있는 오퍼레이터들의 뒷모습에도, 병실 쪽에서도 익숙한 검은 뒤통수는 눈에 띄지 않았다. 그 쏜즈니까 또 어딘가의 작전에서 박사에게 험하게 굴려지고 있을지 모른다. 스스로 녹음한 엉망인 고백을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거려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그 자리에서 맞아 죽더라도 좋으니 일단 얼굴이 보고 싶다. 모처럼 살아 돌아온 것이 장해서라도 죽이기 전에 입맞춤 한 번 정도는 허락해 줄지도 모른다.
“ 그런데, 장렬한 유언까지 남겨놓고 돌아온 건 좋지만 좀 창피해서… …, 지금 제일 마주치고 싶지는 않다고나 할까 일단 물어만 보는 거지만!! 브라더- 오퍼레이터 쏜즈는 어디서 작전 중이지? ”
의료대원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흠칫하고 일순간 한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가 아무 말도 못 들은 것처럼 자리를 떴다. 어쩐지 가슴을 채우는 불길함에 그녀가 바라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긴 모래 해변의 한쪽에 떠나기 전에 본 적 없는 거대한 바리케이드가 바다를 가리는 것 처럼 세워져 있었다. 주변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로도스의 대원조차 아니다. 험악한 분위기의 용병들이 주변에 접근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그날 밤. 소란스럽던 불안은 리베리를 잠드는 대신 바리케이드 근처에서 순찰조에 붙잡히게 만들었다.
“ 하하. 결국 들켰네. 전우, 역시 이 안에 뭔가 있는 거지? ”
“ 엘리시움… … 들어 갈 생각이면 말리지는 않겠다. 하지만 그 안에서 무엇을 보건, 죽지 않겠다고 약속해. ”
“ … … 이제와서? ”
“ … …물어보고 싶은 것은 없나? ”
“ 음… … 작전계획을 듣고 생각해봐도 될까? ”
“ 일단 따라와라. ”
단순한 대기지점에 대한 설명만을 듣고 바리케이드 안으로 들어서자, 밤에도 근방이 어둡지 않았던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파도 위에, 일그러진 태양이 하나 떠 있다.
도식화된 이베리아 성화 속의 팔각 헤일로를 단 이형, 사방으로 뻗어 나온 빛나는 가시에는 군데군데 바다 그 자체가 때까치의 제물처럼 꽂혀있었다.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초점을 대신해 조용한 살의만이 빛나고 있었다. 존재감이 너무나 강렬한 나머지 눈앞에 있는데도 역설적으로 시야의 구석으로 보는 것 처럼 흐려지는 비현실적인 형상이었다.
작전 인원들이 굳은 표정으로 사전에 지시받은 위치대로 산개하고, 해변가에 널브러진 시테러들의 거추장스러운 시체를 정리할 때에도 미동도 않던 그것은, 엘리시움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천천히. 머리만을 이쪽으로 향했다.
마치 표정이라도 떠올리는 것 처럼, 황금색 눈동자에 빛이 스쳤으나 그것은 곧 사라졌다.
눈 없는 그림자는 당신을 바라본다.
그것은 마침내 안식이 예비 되었음을 이해했다.
신뢰가 배신당하지 않은 것에 대한 벅차오를 정도의 감사와 환희 앞에 그것은 이름을, 때를 기다렸다.
“ … …쏜… …즈? ”
꽃이라도 피우려 하는 것 같았다.
골격뿐인 가시로 된 사지와 함께 무수한 촉수들이 다섯겹의 늑골을 조가비처럼 안에서 밖으로 열어젖히고, 더 이상 사람이 아닌 펼쳐진 흉곽의 안쪽에는 감당하기에는 너무 커져 버린 감정을 담아 둘 심장 대신 두 눈처럼 황금색으로 등불같이 일렁이는 오각의 기관이 떠 있을 뿐이었다.
순식간에 해변까지 다가온 그것의 눈은 불타는 것 같았고 저마다 의식이 있는 촉수 하나하나에서 울리는 꺼림칙하고 불규칙한 고동이 이를 가는 파도 소리보다 귓가에 우레 같았다.
“ 물러서! 저건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정신 차리고 작전 위치로 돌아가! R131!!! ”
정확한 타이밍의 발파로 무너져 내리는 철골들이 굉음과 함께 그것과 엘리시움 사이를 가로막았다. 소름끼치도록 완벽한 변모를 앞에 두고 이해가 따라가지 못해 망연자실한 리베리는 있는 힘껏 뺨을 얻어맞고서야 깨달았다.
… …뭐가 ‘들어가겠다면 말리지 않겠다’ 인가.
내가 그의 준비된 단두대다.
너무 오래된 갈망과 눈치채지 못한 척 좁은 침대에 마주 누웠던 모든 밤이, 결국은 끝까지 감정을 밀봉하지 못한 나의 나약함 때문에, 우리는 이곳 이베리아의 바다로 돌아와 서로에게 심판을 받고 있다.
하지만 엘리시움이 제멋대로 그어놓은 선 밖에서 묵묵히 기다려주던 그는 피해자가 아니던가.
모든 단죄는 그가 아닌 자신에게 향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 엘리시움!! 위험해!!! ”
동작은 모든 것이 느리게 느껴졌다.
머리는 베인 것이 아니라 엘리시움이 반사적으로 휘두른 검의 궤적에 우아하게 스스로 들어와 몸과 분리 된 것 처럼 보였다. 실로 검술의 대가가 아니면 계산도 할 수 없는, 타인의 검을 무기로 한 깔끔하기까지 한 자발적 절단이었다.
그 비인간적인 움직임은 절대로 데스트레자가 아니었지만, 잘린 목에서 피를 대신해 뿜어져 나와 주변에 흩뿌려진 금색의 부식성 체액이 한 때 엘리시움의 옆에 서던 에기르를 웅변하고 있었다.
의도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최후의 역할을 마친 검을 던져버린 리베리는 깨끗하게 잘린 머리가 나쁜 기적처럼 해변에 똑바로 선 채 여전히 자신을 직시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주변의 제지를 힘겹게 뿌리치고 다가가 떨리는 양손으로 들어 올린 그것은 차가웠지만 여전히 부드러운 뺨과 장난처럼 땋은 머리가 남아있었다.
아직도 꺼지지 않은 의지는 뭔가를 말하려는 듯하다가 발성기관의 부재를 깨달은 듯 공허하지만 부드러운 눈동자로 그저 엘리시움의 눈을 고요히 올려다보았다. 마치 그렇게 하면 그의 눈물이 멈추기라도 할 것 처럼.
“ 있지… … 아직 들려? 내 이름은 ————야. ”
“ … … ”
“ 혹시 다음이 있으면. ”
“ 코드네임도, 재앙도, 광석병도 없고, … …에기르나 리베리도 없고, 이런 바다도 없고, 뭐 하늘이나 소소한 다툼은 있어도 되는 그런 세계에서 다시 만나면, 그때는 그렇게 불러주면 안될까. ”
“ … …”
“ 약속이 안되면 내기라도 하자. 기억하고 있으면 네가 이기는 걸로. ”
“ 어때. ”
너무 많은 것을 미련 없이 떨쳐내 버려 참을 수 없이 가벼워진 이름 모를 에기르에게 입을 맞추자 잊고 있었던 피부 아래 불타는 돌의 감각이 숨을 삼키게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속살을 찢는 고통만이 ————의 남은 세계에서 가장 확실한 약속이었다.
잘 아는 색을 한 눈동자는 리베리의 눈물이 마른 것을 확인한 것 처럼 한 번 길게 깜박이고,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