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파란합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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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고 말하지 마

- 우쓰(@ANSUSANG)
   쏜즈는 눈을 떠 주변을 둘러본다. 잔잔하게 잦아든 파도, 구름이 여유롭게 흘러가는 새파란 하늘, 멀리서 울리는 바닷새의 울음소리, 모래사장을 가로지르는 발소리.
 
   브라더, 이런 곳에서 뭐 해?
 
   맨발의 엘리시움은 쏜즈의 옆에 나란히 서, 쏜즈의 시선이 향하던 곳을 함께 바라본다. 수평선 너머는 지극히도 고요하고 평화로우며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다.
 
   서 있기만 하면 심심하잖아, 조금 걷지 않을래?
 
   익숙한 밴드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앞서 나가다 한 바퀴 빙글, 도는 엘리시움의 옷차림은 몹시 가볍고 그 품엔 무기도 통신기도 없다. 쏜즈는 그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평온한 순간을 침묵으로 지키고 싶건만, 의지에 반하는 어떤 힘에 끌려가듯 천천히 입이 열린다.
 
   네 통신기는 어디에 두고 왔지?
   응? 내 통신기라면… … 네가 가지고 있잖아?
 
   파도 소리가 거세진다. 크게 밀려든 파도가 엘리시움의 다리를 스치고 지나자 새빨간 핏물이 함께 바다로 쓸려간다. 몇 번의 파도에 의복의 기능을 잃어버린 옷자락, 녹슬고 부러진 무기,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쥐고 있던 새하얀 손까지 전부 바닷속으로 사라졌을 때, 엘리시움이 있던 자리에는 마지막 통신의 마지막 한 마디를, 영원한 작별 인사를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낡고 이끼 낀 통신기 한 대뿐이다.
 
   안녕, 안녕, 안녕… ….
 
깃발.png

   쏜즈는 다시 눈을 떠 언제나 똑같은 꿈에서 벗어난다. 살기 위해 애쓰던 인류가 밀려드는 바닷물을 피해 ■달 전에 후퇴한 국경선 ■■■km 지점. 물이 없는 마른 땅을 마지막으로 밟아 본 기억이 언제인지조차 떠오르지 않는 그는 홀로 이곳을 지키는, 스스로 사람임을 포기하고 ■■이 된 자다.
 
   쏜즈는 하루의 일상이 된 밀려드는 침입자 저지와 이따금 먼저 나서는 사냥 외의 시간은 전부 제 생각 속에 잠겨 보냈다. 숨 가쁜 현실은 머리를 계속 굴리며 이성을 유지하고 전투 방법을 잊지 않는 것조차 버거웠던 ■■ 직후의 그를 기다려주지 않아, 그 언저리의 기억은 모두 흐릿한 가운데 인간으로서 가졌던 마지막 순간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고, 그것은 늘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잊어버린 몸으로도 지난밤의 전투가 너무 고되어 그나마 파도가 덜 들이치는 가장 높은 바위―지난달보다 한 뼘 정도 더 누울 곳이 줄어들었다―에 누워 눈을 붙일 때마다 똑같은 꿈으로 나타났다. 세찬 파도에 깎여나가는 바닷가의 바위처럼 형태가 어그러지고 허물어지는 끔찍한 광경은, 더 이상 날지 못하고 바다에 빠진 새의 말로는 꿈속에서조차 마주할 수 없어 늘 그 발치만을, 그를 데려간 파도만을 바라보다 깨어났다. 그런 모습에서 도망치듯 벗어났음에도 침착한 숨과 더 이상 빠르게 뛰지 않는 심장은 지금 자신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자각시켰다.
 
   쏜즈는 아주 오래전부터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이 되기 전, 마지막 이야기만을 재생할 수 있도록 아주 작게 만들어 품의 가장 깊숙한 곳에 넣어둔 통신기는 일방적인 말만을 건넸기에 대화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가 예상한 대로 그를 한 명의 오퍼레이터처럼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게 된 박사가 건넨 함께 후퇴하자는 말엔 고개만 가로저었다. 그 미약한 저항만이 쏜즈가 유일하게 듣지 않은 박사의 명령이었다. 위험해지면 언제든 이리로 오라는 말조차 듣지 않고 있으니 유이로군, 자조하듯 내린 결론의 이유가 또다시 눈앞에 펼쳐졌다. 저들 역시 성대를 떨며 발성하는 행위에 큰 의의를 두지 않았다. 누구도 듣지 않는 말은 무의미했다.

깃발.png
 
   안녕, 안…, …녕… ….
 
   쏜즈는 잡음이 섞여 말이 흐릿하게 들리기 시작한 통신기를 껐다. 무릎 밑까지 온 바닷물이 부쩍 차갑게 느껴졌다. 늦가을쯤인가. 이곳을 지킨 지도 며칠째, 같은 걸 하루하루 세며 지냈다가는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판단에, 일부러 시간과 날짜에 대한 감각과 개념만 흐릿하게 만들어 수온으로만 어렴풋이 계절을 예측했다. 습한 구름은 눈을 만들지 않고 짜디짠 바닷물은 얼지 않지만 시리게 차가워진 수온에 적응하기 위해 극한으로 체온을 낮췄던 경험의 횟수만큼 햇수를 세었다. 몇 번이었지? 두 번? 세 번? 그 이상? … …의미 없고 비효율적인 행위다.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브라더는 추위를 많이 타니까 따뜻하게 입어야지. 귀찮다고 하지 말고, 목도리도 둘러. 이 목도리, 내 이름도 써 놨으니까 잃어버리지 말고 꼭 가져와야 해!
 
   까마득한 기억이다. 그가 이렇게 밝은 목소리도 낼 수 있었던가? 마지막 통신의 쾌활함을 가장한 지친 말투와 떨리는 목소리로 건넸던 인사에만 익숙해져 이 시절의 그는 뇌리 아주 깊숙한 곳에 묻어둔 지 오래였다. 뒤이은 장면에서 외근 중 거센 바람에 날아간 목도리를 찾아 설원 지대를 뒤지던 제 모습 역시 의미 없는 생각이기에 그만두려 했으나, 한 번 열어젖힌 기억은 아주 작은 틈새로도 쉴 새 없이 빠져나왔다.
   추운 지방의 전달자로 일하던 시절의 옷을 입고 나타나 로도스의 모든 이에게 선물을 나눠줄 거라 외치더니 보조 사슴 역으로 자신까지 끌고 가던 커다란 손의 열기가 지금의 손끝에도 느껴지는 듯했다. 승산도 없는 눈싸움 대결을 신청하더니 친분 있는 중장 오퍼레이터를 둘이나 데려오는 꼼수를 썼다가, 자신이 두 사람 사이로 절묘하게 던진 눈덩이를 얼굴에 정통으로 맞고 넘어졌을 때 외친 말들은 지금 한 글자도 빼먹지 않고 적을 수 있다. 눈 쌓인 언덕 위에서 누가 더 빨리 내려가는지 시합하기 직전, 두 사람 사이로 멋지게 날아올랐다가 볼썽사납게 언덕을 구른 오퍼레이터를 보고 없던 시합으로 했던 일도 있었다.
   이베리아의 해안선을 지키는 장기 작전에 누구보다 먼저 자원한 그와 뒤이어 자원한 자신이 로도스를 떠나기 전날 밤, 마주 누운 그의 눈에 보였던 희망 뒤의 희미한 두려움을 알면서도 모른 척 눈을 감았다. 엉망이 된 전초기지 복구를 위해 하얀 입김을 뱉으며 사방으로 뛰어다니던 검은 뒷모습이 부자연스럽게 멈추는 걸 몇 번이나 봤음에도 묵묵히 무기를 정비하고 전장으로 향했다.
 
   자… 내가 이렇게 안아주니까 더 따뜻하지?
 
   조금 붉은 얼굴로 미열을 나눠주던 그날 밤 그는 생사를 넘나드는 고열에 시달렸고, 겨우 진정될 무렵 걷어 올린 오른팔에는 ‘장식’이 가득했다. 자신이 여전히 침묵을 지키자, 겨우 눈을 떠 다시 아침을 맞이한 그의 인사는 한결같았다. 안녕, 좋은 아침.
   초겨울을 앞둔 오후, 가느다란 빗줄기가 쉴 새 없이 떨어지며 바다에 섞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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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기억해줄래? 물속에서 들은 것처럼 울린 앳된 목소리에 흐릿하게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지. 바다에 생각을 흘려 넣자 파도를 타고 맑은 웃음소리가 번졌다.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 소년의 마지막 말은 꽤 덤덤했고, 따뜻했다. 쏜즈는 한 번도 돌아본 적 없던 제 뒤를 바라보았다. 습한 바람을 타고 온 희미한 환호―어쩌면 흐느낌―와 함께, 저 멀리서 푸른 무언가가 반짝였다.
   저것이 이야기의 끝이라 해도, 쏜즈에겐 지금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다시 앞을 바라보자 그와의 무도회를 바라는 이들이 촉수를 넓게 펼치며 다가오고 있었다. 검을 고쳐 잡은 쏜즈는 기꺼이 댄스 신청에 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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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까마득하게 먼 방어선에서 다가오던 푸른 빛이 쏜즈의 완전히 잠긴 하반신을 감싸듯 스쳐 지나갔다. 오늘따라 어떤 것도 물 위로 나오지 않아, 해수면을 침대 삼아 부유하듯 누워 오랜만에 휴식을 맞이했다. 바다에 비친 상이 아닌 하늘을 보는 건 무척 간만이었다. 일렁이지 않는 밤하늘엔 이름 모를 별들이 가득했고 주변의 푸른 빛들도 저곳에 섞이려는 듯 쏜즈의 곁에서 비상을 택했다. 두 팔을 벌려 물에 닿는 면적을 늘리자 빛무리는 팔의 형태를 따라 간지럽히다 날아올라 하늘까지도 온통 푸른색으로 물들였다.
 
   쏜즈는 별자리 같은 거 알아? 아, 그런 대답 할 거라 예상했지만.
 
   이젠 당연한 듯 기억 속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더 선명하게 듣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는 커다랗고 밝은 별들을 이어 형태를 잡고 이야기를 덧붙였다.
 
   신은 안타깝게 죽은 이 생명을 불쌍히 여겨 별자리로 만들었다고 해. 난 신도도 아니고 신의 존재를 믿지도 않지만, 꽤 재미있는 이야기야. 재미라기보다는, 낭만이려나? 죽어서 별이 된다니 좋잖아. 후후, 만약 내가 별이 된다면 브라더가 꼭 ‘절세미남자리’를 만들어 줘… …
 
   각자의 이름을 가진 별들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기왕이면 천 년에 한 번 태어날까 말까 한 커다란 별들만으로 그를 구성하고 싶다는 소망은 달리 건넬 신조차 없어 마음속에 품고 바다에 흘려보내듯 생각했다.
   그러자 그의 터무니없는 소망에 응하기라도 하듯, 바다의 모든 것이 일제히 푸른 빛에 감싸여 수면 위로 떠올라 별을 향해 나아갔다. 어떤 저항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 각자의 모습엔 숙명까지 느껴졌다. 거꾸로 떨어지는 은하수가 바다 위의 바다로 뛰어들수록 바닷물이 점점 낮아지는 게 느껴졌다.
   그들이 이 땅에서 가진 의지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쏜즈는 품속의 통신기를 꺼내 마지막 소리를 재생했다.
 
   … …, … …, … … … ….
 
   이젠 말조차 들리지 않는 잡음뿐이었지만, 쏜즈는 어떤 꿈도 꾸지 않고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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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평선 너머로 서서히 해가 떠오르자 하늘에 드리운 검은 커튼이 걷혔다. 바다의 색채를 품고 더 넓은 바다를 향해 떠나는 존재들은 쏜즈를 돌아보지 않고 부지런히 떠나, 구름뿐이던 하늘에 조금씩 새로운 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쏜즈는 하늘 위로 손을 뻗어 가장 큰 별들만을 멋대로 잇고 ‘절세미남자리’라 이름 붙였다. 상상력이 부족해 이야기는 만들지 못했지만 그라면 분명 백 년에 한 번뿐인 전설이 있어, 로 운을 띄우며 기나긴 이야기를 시작하겠지. 어느샌가 조금 소리 내어 웃었더니, 쏜즈의 존재를 알아차린 새하얀 빛줄기가 수평선을 가르고 쏟아지며 금빛 눈을 찬란하게 빛냈다. 눈을 찌푸려 흐릿하게 바라본 빛의 끝에서, 누군가 발목까지 낮아진 물살을 가르며 쏜즈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한껏 걷어붙였지만 다 젖은 바지와 바람에 밀려 꼬리처럼 펼쳐진 기다란 외투. 아주 오래된 기억 속의 밝은 목소리로 쏜즈를 부르며 두 팔을 흔들다 미끄러져 빠질 뻔한 몸을 간신히 붙잡자, 손을 맞잡은 그가 지은 환한 미소는 빛을 등진 얼굴조차도 밝게 빛냈다. 쏜즈 역시 그에게 미소 지으며, ■■이 된 뒤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다.
 
   안녕, 엘리시움.